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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피어스" 줄거리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1853.03.04 ~ 1857.03.04 민주당

 

🎬 영화제목:《분열의 서곡 (Prelude to Division)》

1852년, 잘생긴 외모와 멕시코 전쟁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민주당의 정치 신성 "프랭클린 피어스"는
압도적인 지지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정치적 승리는 끔찍한 개인적 비극과 교차한다.
취임식을 불과 몇 주 앞두고 가족과 함께 기차 여행을 하던 중, 열차 탈선 사고로
하나 남은 아들 '베니'가 피어스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아내 제인은 절망에 빠져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피어스" 역시
극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국가의 수장이 된 그는 환희가 아닌 비탄 속에서 백악관에 입성한다.

"피어스"는 유약해진 심신을 달래고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강력한 남북 화합을 주장한다.

그는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믿으며, 북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부 노예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온건한 타협'을 선택한다.

이때, 야심 차게 대권을 노리는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이 "피어스"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
새로 편입될 영토(캔자스, 네브래스카)의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자는 '주민 주권론'이었다.

피어스는 이것이 민주주의적 해결책이며
남북 모두를 만족시킬 타협안이라고 굳게 믿고,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a Act)에 서명한다.

"피어스"의 예상과 달리, 이 법은 미국 전역을
폭발적인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1820년 미주리 타협으로 유지되던
노예제 균형이 깨지자,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캔자스로 대거 몰려든다.

두 세력은 서로를 공격하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
총격전과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캔자스는 순식간에 내전 상태인 '피 흘리는 캔자스 (Bleeding Kansas)'가 된다.

북부에서는 "피어스"를 "남부의 앞잡이"라며 비난하는
시위가 매일같이 열리고, 그의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던 민주당마저 분열되기 시작한다.

"피어스"는 자신의 '타협'이 오히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상황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다.

아내 제인은 이 모든 비극이 아들을 잃은 벌이라며
그를 비난하고, 피어스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고독하게 무너져간다.

1856년 민주당 전당대회, 현직 대통령인 "피어스"는 국가를 분열시켰다는
오명을 쓰고 재선 후보 지명을 받는 데 처참하게 실패한다.

그는 임기 말,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백악관을 떠난다.
퇴임 후,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정치적 미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세월이 흘러 1861년, 자신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남북전쟁이 마침내 터진다.

늙고 병든 피어스는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나의 타협이 연방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비극을 앞당겼다"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씁쓸하게 독백한다.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가장 실패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그의 뒷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역사적 배경

 

1853년 미국은 빠른 영토 확장과 경제 성장 속에서도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안고 있었다.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지만, 새롭게 획득한 지역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문제가
북부와 남부의 가장 큰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북부는 산업화를 바탕으로 자유노동 체제를 확대하려 했고, 남부는 면화 농업과
노예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제 확대를 요구했다.

이러한 대립은 미국 사회를 점점 더 깊이 분열시키고 있었다.

1850년에는 "1850년 타협안(Compromise of 1850)"이 통과되어
일시적으로 갈등이 완화되는 듯 보였다.

캘리포니아는 자유 주로 연방에 가입했고, 남부는
강화된 "도망 노예법(Fugitive Slave Act)"을 통해 일정한 양보를 얻었다.

그러나 이 타협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북부에서는 도망 노예법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이어졌고, 남부는 자신들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었다.

미국 사회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갈등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52년 대통령 선거가 열렸고, 민주당

후보인 "프랭클린 피어스"가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피어스"는 뉴햄프셔 출신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멕시코-미국" 전쟁에서는 준장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북부 출신이면서도 남부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남북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취임은 개인적인 비극 속에서 시작되었다.

취임 직전 가족과 함께 이동하던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의 막내아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피어스" 부부에게 큰 충격을 안겼으며, 특히 부인 제인 피어스는 깊은
슬픔으로 인해 공식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인적 고통은 피어스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어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a Act)"의 제정이었다.

이 법은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주도하여 추진한 법안으로, 새롭게 조직되는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지역에서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들의 투표(주민주권)에 맡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은 1820년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에서 정한 노예제 제한 원칙을 사실상
무효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부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법안이 통과되자 노예제 찬성과 반대 세력이 캔자스 지역으로
몰려들어 선거를 조작하고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고 불리며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정치적 폭력 사태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다.

마을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북부와 남부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고, 미국 사회는 사실상 내전 직전의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또한 "피어스" 정부는 남부 횡단 철도 건설을 위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현재의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남부 일부를 매입한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도 추진하였다.

이로써 오늘날 미국 본토의 국경선이 거의 완성되었으며, 향후 대륙횡단철도
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피어스"의 정책이 큰 비판을 받았다.

그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지지하고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이를 집행하려 했지만, 북부에서는 노예제 확대를 용인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남부에서도 충분히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결국 민주당 내부에서도 그의 지지는
크게 약화되었고, 18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재선 후보로도 지명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는
미국의 분열이 급속히 심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은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타협을
목표로 했지만, 오히려 노예제 갈등을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피어스 시대는 "미국 남북전쟁으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로 평가되며, 미국 민주주의가
가장 큰 시험을 받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총평

 

"프랭클린 피어스"는 미국 제14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법률가이자 정치인이었으며, 북부 출신이면서도 남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온건파 민주당 인물이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당시 많은 국민들은 그가 노예제 문제로 갈등하던
북부와 남부를 화합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오히려 미국 사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된 시기로 기록되었으며, 결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어스의 가장 큰 정치적
결정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a Act)"을 지지하고 시행한 것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직접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주권'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법은 1820년 미주리 타협의 핵심 원칙을
사실상 무너뜨렸고, 북부와 남부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캔자스 지역에서는 노예제 찬성과 반대 세력이 무력을
사용하며 충돌하는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 사태가 발생했고, 미국 사회는 정치적
논쟁을 넘어 실제 폭력과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피어스의 정책이
미국 남북전쟁을 앞당기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그는 국가의 통합을 위해 타협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북부에서는 노예제 확대를 허용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부에서는 자신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샀다.

결국 그는 임기 말에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고, 민주당에서도 재선 후보로
지명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피어스"를 단순히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다소 일면적일 수 있다.

그는 국가의 발전을 위한 여러 정책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을 통해 현재의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남부
일부를 확보하여 미국 본토의 국경을
거의 완성했고, 훗날 남부 횡단철도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행정부 운영에서도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개인적인 삶 역시 매우 비극적이었다.

대통령 취임 직전 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었고, 그 충격은 피어스와 그의
가족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특히 부인 제인 피어스는 깊은 슬픔 속에서
대부분의 공식 활동을 중단했고, 피어스 역시 개인적인
고통을 안은 채 국정을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인간적인 비극은 그의 정치적 판단과 리더십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역사적으로 "프랭클린 피어스"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과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미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정치적 협상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깊어져 있었다.

그의 정책은 당시에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미국 사회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한 결정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종합하면 "프랭클린 피어스"는 "국가의 통합을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분열을 막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주주의 절차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시대의 거대한 갈등과 정치적
현실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은 미국이 왜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을 피하지
못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피어스의 삶과 정치적 선택은 지도자의 의도만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국가적 위기 속에서
올바른 판단과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교훈으로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다.